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 中
【五月初一】
次日為五月朔日,勢雖稍減,然亦未嘗不殺人,未嘗不掠取;
而窮僻處或少安;
富家大室方且搜括無餘,子女由六七歲至十餘歲搶掠無遺種。
是日,興平兵復入揚城,而寸絲半粟,盡入虎口,前梳後篦,良有以也。
【5월 1일】
차일(次日)은 5월(月)의 삭일(朔日)이었는데, 세(勢)가 비록(雖) 초감(稍減)하였으나,
그러나 역시(亦) 살인(殺人)이 없지는 않았고, 약취(掠取)가 없지도 않았는데,
이에 궁벽처(窮僻處)는 혹(或) 소안(少安)하였고, 부가(富家)와 대실(大室)은 바야흐로 또한
수괄(搜括/착취)하여 무여(無餘)하였고, 자녀(子女)는 6~7세(歲)로부터 10세(歲)에 이르기까지
창략(搶掠/빼앗고 약탈함)하여 유종(遺種/씨를 남김)하지 않았다.
이날에, 흥평(興平)의 병(兵)이 양성(揚城)에 복입(復入)하였고,
이에 촌사(寸絲/짧은 실)와 반속(半粟/좁쌀 반톨)도 호구(虎口)에 진입(盡入)하니,
전소(前梳/앞은 얼레빗)와 후비(後篦/뒤는 참빗)라 함은 양유이야(良有以也/참으로 그 이유가 있음)로다.
【5월 1일】
다음날은 5월 초하루였는데 기세가 비록 점차 감소하였으나 그러나 역시 살인이 없지는 않았고, 노략질이 없지도 않았으며,
이에 궁벽한 곳이나 혹 조금 안전하였고 부잣집과 큰 집은 바야흐로 또한 착취하여 남은 것이 없었고
자녀는 6~7세로부터 10세에 이르기까지 빼앗겨 씨도 남지 않았다.
이날에, 흥평백(고걸)의 병력이 양주성에 다시 들어왔고 이에 짧은 실이나 좁쌀 반톨 마저 호랑이 입에 모두 들어가니
앞은 얼레빗이고 뒤는 참빗이라 함은 참으로 그 이유가 있음이로다.
요약.
1645년 5월 1일 양주성 함락 6일차.
전날 청 귀족의 말처럼 도도의 칼을 봉하라는 봉도령이 내려진 것처럼 살인의 기세가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날 도주했던 흥평백 고걸의 남명군이 양주성으로 들어와 약탈을 자행한다.
왕수초는 얼레빗과 참빗을 비유하며 한탄한다.
-15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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