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공험진은 길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동사강목 1109년 5월 기사中
○ 여진이 오연총을 공험진에서 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자 윤관을 보내어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오연총이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길주(吉州)를 구원하려고 가다가 공험진에 이르자 적이 길을 가로막고 기습하여,
우리 군사가 크게 패배하였다.
고려사 1109년 5월 기사中
○ 여진이 길주성을 포위하였다. 성으로부터 10리 되는 곳에 작은 성을 쌓고 목책 여섯 군데를 세워 수개월 동안 몹시 급하게 성을 공격하여 성이 거의 함락될 뻔하였다. 병마부사 이관진 등이 군졸을 독려하여 하룻밤에 다시 내성을 쌓고 지키면서 싸웠으나, 싸움이 오래되고 힘이 지쳐서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오연총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하려 하니, 여진이 길을 막고 불의에 습격하여,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죽고 포로된 것이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연총은 장계를 갖추고 죄 받기를 청하였다.
고려사 오연총 열전中
그 후 여진이 또다시 원근 부락들의 인원을 집합하여 몇 달 동안이나 길주를 포위하고 성 바깥 십리에 작은 성을 쌓고 여섯 곳에 목책(柵)을 만들고 맹렬하게 성을 공격하므로 성이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다. 병마 부사 이관진(李冠珍) 등이 병사들을 격려하고 하룻밤 사이에 다시 겹성을 쌓아 일변 전투, 일변 방어에 힘썼으나 전투가 오래 계속되고 기세가 꺾이어 사상자가 많았다. 오연총이 이 소식을 듣고 분연히 출정하려 했으므로 왕이 다시 부월을 주어 보냈다.
오연총의 군대가 공험진에 이르렀을 때에 적들이 길을 막고 요격하므로 우리 군대가 대패를 당하고 장병들이 무기를 버리고 여러 성으로 뿔뿔이 흩어져 들어갔으며 사망자와 부상자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오연총은 전황 보고를 상세히 하고 자기의 죄과를 비판한 후 윤관과 함께 군대를 정비하고 재차 길주를 향하여 갈 때 때마침 적의 사신이 와서 강화를 청했으므로 오연총이 드디어 돌아오게 되었다.
→ 길주를 구원하기 위해 공험진을 거쳐 간다
→ 길주는 1107년 12월 24일(병신일)에 축성을 개시하여 1108년 1월에 완료 됨
군정 680호, 백성 7000호, 성곽규모 670간(둘레 1.22km), 위치 여진 궁한촌(弓漢村)
→ 길주성 : 관병 약 700 + 군인가족 약 3400명 + 백성 35000명 = 총합 약 39000 명
/ 1인당 면적 0.72평
→ 공험진은 1108년 2월27일 축성 완료
군정 532호, 백성 5000호
※ 길주 관내로 확인되는 영주, 웅주, 선화진
고려사 지리지中
○ 영주(英州).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이름을 안령군(安嶺郡)이라 하였으나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가 뒤에 길주(吉州)에 병합하였다.
○ 웅주(雄州).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이름을 영해군(寧海軍)이라 하였으나 4년에 성(城)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에게 돌려 주었다가 뒤에 길주(吉州)에 병합하였다.
○ 길주(吉州). 오래 여진(女眞)의 점령한 까닭에 이름을 궁한촌(弓漢村)이라 하였다.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6년에 중성(中城)을 쌓았으나 이어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빼앗겨 해양(海洋)【해양(海陽)이라고도 하였다 함.】 이라 칭하였으나 공민왕(恭愍王) 때에 옛 땅을 되찾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웅․길주 등처 관군민 만호부(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두었다.【길주(吉州)는 북쪽에 있고 웅주(雄州)는 남쪽에 있다.】 난도(卵島)가 있다.
○ 선화진(宣化鎭). 예종(睿宗) 4년에 성(城)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가 뒤에 다시 찾아 길주(吉州)에 병합(倂合)하였다.
고려사 윤관 열전中
윤관이 또다시 여러 장군들을 각 방면으로 보내 국경선을 획정(畵定)하였는바 동으론 화곳령(火串嶺)까지 북으론 궁한이령(弓漢伊嶺)까지 서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또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를 몽라골령으로 보내 터전을 잡아 9백50 간(間)에 달하는 성곽을 쌓고 영주성(英州)이라 이름 지었으며 화관령 아래에는 9백92 간의 성을 쌓고 웅주성(雄州)이라고 이름 짓고 오림금촌(烏林金村)에는 7백74 간의 성을 축조하고 복주성(福州)이라 명명하고 궁한이촌(弓漢伊村)에는 6백70 간의 성을 축조하여 길주성(吉州)이라고 불렀으며 또 호국인왕(護國仁王), 진동보제(鎭東普濟) 두 절을 영주 성 안에 창건하였다.
동사강목 1107년 기사中
윤관은 또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어 땅의 경계를 획정(畫定)하였으니 동쪽으로는 화관령(火串嶺)까지 이르고, 북쪽으로는 궁한이령(弓漢伊嶺)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까지 이르렀다. 또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에게 지형을 살피게 하여, 몽라골령의 아래에는 영주성(英州城)[지금의 길주(吉州)에 있다]을 축조하고, 화관령의 아래에는 웅주성(雄州城)[지금의 길주(吉州)에 있다]을 축조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는 복주성(福州城)[지금의 단천(端川)에 있다]을 축조하고, 궁한이촌에는 길주성(吉州城)[웅주(雄州)의 북쪽에 있다]을 축조하였다. 여진의 요을내(裊乙乃) 등 3천여 명이 와서 붙 쫓았다.
길공구가 상상해 본 길주관내 여러 성들
*영주, 웅주, 선화진, 공험진, 몽라골령, 화관령 등은 모두 위치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단지 길공구의 대략적으로 찍어?본 추측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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