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9)

 1126년 4월 기사中

 

ㅇ 정응문(鄭應文)과 이후(李侯)를 금 나라에 보내어 신(臣)이라 일컫고 표문을 올리기를, “대인(大人)이 전통을 이어서 사방에 위엄을 떨치니, 다른 나라들이 조하(朝賀)하려고 이역만리를 건너오거늘 하물며 국경이 접해 있으니 정성을 바치는 마음 더욱 간절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천품이 영명하셔서 덕업을 날로 새롭게 하시어 제왕의 조령이 발표될 때마다 모든 백성이 기뻐하지 않는 자 없으며, 위력이 미치는 인근의 적국이 감히 거역하는 자 없으니, 진실로 제왕의 위대한 능력이시며 천지도 은연히 보호하는 바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소국의 미약한 몸과 변변치 못한 덕으로 위대한 공적을 듣고 경모하는 마음이 간절한 지 오래였으니 약소한 물건으로 충성과 신의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비록 변변하지 못한 예물임을 부끄럽게 여기나, 넓은 도량으로 받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였다. 

이로써, 고려와 금나라의 맹약은, 몽고에 의해 금나라가 멸망하게 될때까지, 100여년 동안 굳건히 이어지게 됩니다.

매년 정월이면 서로 사신을 통해 안부를 묻는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보물등도 주고 받게 되지요.

특별한 외교분쟁없이 백년동안 평화를 이루어냈으니, 이자겸과 척준경의 숭금정책이 꼭 나쁘다고는 볼수 없겠지요.

조금만 더 현명하게 여진 정벌을 이루워냈더라면, 아마 여진족은 완전히 고려에 복속될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면 금도 없었을 것이고, 청도 없었을것이고, 아마 고려는 우수한 군사력으로 동북아 최강국으로 군림할수도 있었을테지요.

한편 이를 들은 인종께서는 다시 지추밀원사 김부일(金富佾)에게 안장 갖춘 좋은 말을 척준경에게 전해주어, 거사를 재촉합니다.

한편 4월 조정 개각을 단행해, 칩거에 들어가 있는 척준경에게 문하시랑 판병부사직을 임명하여, 군권을 맡기어 신임을 얻으려 합니다. 당시 이자겸도 척준경을 달래려, 판병부사직 제수에 찬동하게 됩니다. 또한 인종은 최측근인 김부일을 행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하여, 거사를 준비합니다. 이때 개각에서는 김부식(金富軾)이 차관격인 어사대부 추밀원부사에 임명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시기부터 이자겸은 인종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은듯 싶습니다.

4월에는 안화사에 인종이 거둥(임금의 행차)하였는데, 만조백관이 임금이 탄 말을 향해 절을 하였는데, 이자겸은 태연히 인종을 바라만 보고 있었으며, 5월에는 기어코 인종을 독살할려는 시도까지 하게 됩니다.

 

1126년 5월 기사中

ㅇ 5월에 연경궁(延慶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자겸이 궁의 남쪽에 거처하면서 북쪽 담을 뚫어 궁 안으로 통하게 하고, 군기고의 갑옷과 무기를 가져다 집 안에 보관하였다. 왕이 일찍이 혼자서 북쪽 동산에 나아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얼마 후에 이자겸이 십팔자(十八子=李)의 비결대로 왕의 자리를 도모하고자 떡에 독약을 넣어서 왕께 드렸는데, 왕비가 비밀리 왕께 알려 떡을 까마귀에게 주었더니 까마귀가 죽었다. 또 독약을 보내어 왕비를 시켜서 왕에게 드리게 하였더니 왕비가 대접을 들고 일부러 넘어져 엎질러 버렸다. 왕비는 바로 자겸의 넷째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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